Music Story
요제프 시게티(미국, 1892-1973)
크라이슬러나 하이페츠가 바이올린 연주계를 평정하던 20세기 초반에 새로운 두계열의 연주자들이 등장하여 수많은 청중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폴란드 태생의 후베르만으로도, 그의 연주는 비정통적인 연주법을 바탕으로 비록 정교하지는 못했지만 감각적이고 강렬한 음색을 만들어 내는 카리스마형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요제프 싱거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었던 시게티였다.
시게티는 그의 음악성만큼이나 독특한 연주 자세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구부정한 구식의 연주 모습은 그의 최초의 스승이었던 부다페스트 오케스트라의 보조 단원이 전수한 것이었으며 그는 이 자세를 평생 고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예뇌 후바이를 사사한 시게티는 자신의 느린 성장과 빠르게 명성을 얻어가는 동료들 속에서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길은 음악의 사도로서 어울리는 정진의 길이었다. 1906년 무렵이 되어 시게티는 새로운 선생이자 음악의 거의 모든 분야에 박식했던 부조니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시게티가 부조니에게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를 ‘이해’하는 일이었으며 이 가르침을 통해 크라이슬러, 티보, 하이페츠 등의 연주가 가지고 있던 내면적 아름다움과 새로움을 흡수해 나아갔다. 이러한 정진의 과정을 거치던 그에게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미국에 정착해 있던 대지휘자 스토코프스키였다. 그는 시게티가 연주하는 바흐의 샤콘느를 듣고 그를 미국에 초청하여 데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미국에서의 연주와 러시아, 아시아에서는 순회 연주는 시게티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그는 외면적인 감각과 내면적 성실함을 고루 갖춘 세계 제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떠오른 것이다. 언제나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 분방하고 독특한 연주로 청중들을 사로잡는 그의 연주 스타일에 매료된 작곡가도 많았다. 이자이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헌정했으며 프로코피에프도 그를 위해 바이올린 협주곡과 소나타를 작곡했다. 완벽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성실한 음악인의 한 사람으로 시게티의 이름은 아직도 바이올린 연주사에서 그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미국 1875-1962)
사랑스런 소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크라이슬러는 20세기 바이올린계의 위대한 전통을 세운 연주자이다. 그가 10세 때인 1885년에 작곡가 겸 연주자였던 로젠탈과 미국 연주여행을 통해 신동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졌으면 빈 음악원에서 아우어와 헬메스베르거에게 배우고 곧 파리 음악원으로 옮겨서 마사르에게는 바이올린을, 레오 들리브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1900년대 초반, 그는 세기말의 빈 문화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잡았으며 티보, 엘만, 하이페츠, 등과 더불어 새로운 조류의 낭만적 바이올린 연주의 기법을 확립시켰다, 그의 정식 데뷔는 1899년에 있었떤 니키쉬와 베를린 필이 함께 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으며 1943년 미국으로 귀화했다. 온화하고 기품있는 연주를 통해 낭만주의적 해석을 보이던 그의 귀족적인 연주 스타일은 당대에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의 기념비적인 녹음을 RCA를 통해 남기고 있으며 자작 자연의 소품집들도 그의 음악성을 엿볼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에프렘 짐발리스트(미국, 1889-1985)
짐발리스트는 러시아의 성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서 레오폴드 아우어의 가르침을 통해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1907년에 있었던 니키쉬와의 협연이 그를 돌연 악계의 총아로 떠오르게 만들었으며 4년 후인 1911년이 되어서 짐발리스트는 유명한 글라주노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세계 초연함으로써 화려한 미국 데뷔 무대를 성곡적으로 장식했다. 1928년부터 커티스 음악원의 교수직을 맡아 오스카셤스키, 노르만 캐롤과 같은 뛰어난 제자를 배출해 내기도 했다.
그는 동료였던 하이페츠가 열정적이고 초인적인 기교를 통해 음악을 지배하던 것과는 달리 대가풍의 커다란 스케일을 자랑하는 연주를 펼치곤 했다. 간단한 하나의 악구는 하나의 현으로 처리하던 그의 대범함은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1949년 연주 일선에서 은퇴했으나 1952년 메노티의 헌정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 다시 무대로 복귀했으며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작곡가로서도 꾸준한 활동을 펼쳐 오페라와 협주곡, 교향시 등의 작품을 남겼다.
아돌프 부쉬(미국, 1891-1952)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중에서도 아돌프 부쉬는 평생 동안 소규모 앙상블과 실내악단에 바친 열정dmfh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유년기를 쾰른 음악원에서 보낸 그는 빌리헤스, 브람 엘다링, 프리츠 슈타인바흐 등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다. 요아힘이 위대한 전통을 이어가는 교수진 덕분에 이미 유년시절부터 독일 정통과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자질을 연마한 셈이다. 부드럽고 유려한 선율의 구사와 함께 힘보다는 악절의 낭만적 분위기를 살리는 그의 음색은 서정적인 작품을 좋아하던 20세기 초반의 청중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그는 베토벤과 바흐, 브람스 들의 연주로 정평을 얻었으나 자신의 본령이 실내악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빈 콘체르트페라인 4중 주단을 결성했다. 나이 22세가 되던 1913년의 일이다. 이후 부쉬4중주단과 부쉬 챔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직접 지휘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으며 동생인 헤르만과 사위였던 루돌프 제르킨과 함께 한 피아노 트리오의 활동은 이미 연주계의 전설적인 일화가 되었다.
지노 프란체스카티(프랑스, 1902-1990)
프랑스 출신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인 지노 프란체스카티는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이탈리아인으로 파가니니에게 사사하 시볼리의 제자로 마르세이유 오페라 극장의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어머니 역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물론 후천적인 노력도 있었겠지만 이미 태어날 적부터 많은 것을 타고난 연주자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3세 때부터 부친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는대 따져 보면 파가니니의 3대째 제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파가니니는 정평이 나 있다.
1939년 미국 데뷔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파가니니의 1번 협주곡으로 하였고 오먼디의 지후로 녹음한 음반도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품위있고 아름다운 연주로 최고라 인정받고 앞으로도 길이 남을 것이다. 그의 특징이라면 감미롭고 격조높음 음색에 어떤 난곡도 쉽게 처리하는 기교를 들겠다. 스케일이 크지는 않지만 무리가 없고 깔끔한 음질을 가지고 있다. 많은 음반을 남겼지만 미트로풀로스 지휘의 생상의 협주곡 제3번, 발터 지휘의 모차르트 협주곡 제3・4번, 카자드쉬와 협연한 베토벤 소나타 5・9번 등이 특히 좋다.
나탄 밀스타인(러시아, 1903-1992)
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산실로 유명한 오데사에서 1903년 태어난 밀스타인은 명 조련사 아우어 교수를 사사한 후 당대의 명이 이자이에게 배우기 위해 브뤼셀로 갔으나 그에게서는 “어서 가게.. 자네에겐 가르칠 것이 없네”라는 짤막한 대답만을 들었다.
19세 때 정식 데뷔를 하여 러시아, 유럽, 남미 등지에서 활동을 하다 1929년 스토코프스키와 팔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정기 연주회로 미국 데뷔를 하였는데 깔끔한 기교와 단정한 연주 스타일로 미국 청중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다소 차갑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비르투오조라 할 연주자인 그는 대가로서는 드물게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호로비츠와 듀오 활동, 호로비츠, 피아티고로스키와 삼중주 활동이 유명하고 밀스타인 현악 합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에도 심취하였었다. 하나의 금자탑을 세웠다고 평가할 만한 두 차례의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녹음과 골드마르크의 협주곡, 생의 마지막까지 음악에 대해 가졌던 그의 생각이 편린이라도 더듬어 볼 수 있는 ‘The Last Recital’ 음반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캄폴리(이탈리아, 1906-1991)
로마에서 출생한 캄폴리는 대부분의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들과는 달리 음악 학교에서 단 한번도 공부를 하지 않았다.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바이올린과 교수였던 아버지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기능적인 것 뿐 아니라 일급 연주자에게 꼭 필요한 문화적이고 음악적인 배경을 함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12세에 이미 많은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천재 소년으로 칭송받았다.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는데 비첨이나 바비롤리와 같은 대가들의 지휘로 주요 교향악단과 연주 활동을 벌였다. 기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소품집을 쉽게 연주해 내기도 하지만 바흐 문반주곡의 심연을 이해하기도 할 정도로 다재 다능한 연주자인데 레퍼토리가 매우 광범위할 뿐 아니라 어떤 곡을 연주하더라도 자신의 음악으로 만드는 재주를 지닌 개성적인 음악가이다.
데카에서 발매된 LP 음반 이후 음반을 구할 수 없었는데 뷸라(BEULAH)에서 CD로 재발매하여 그 감미로운 음색으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명연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러시아, 1908-1974)
하이페츠와 더불어 세계 바이올린계를 양분했던 거장 오이스트라흐는 1908년 오데사에서 출생했다. 1935년 지네트 느뵈 다음으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고, 1937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쿠르에서 29세의 나이로 우승하여 전 유럽에서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나, 2년 후 발발한 세계 대전 때문에 1945년까지 동구와 소련에 국한된 활동을 했다. 따라서 전후 그의 유럽 출현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러시아 연주 양식에는 화려한 기교와 깊이 파고드는 정서의 표현을 그 특징으로 하는 유명한 ‘아우어파’라는 전통이 있다. 그의 스승인 스톨랴르스키도 그 흐름을 탄 사람이니 오이스트라흐도 아우어파의 전통을 가진 연주자이지만 그 전통을 그대로 방아들이지 않았고 나름대로 개선하여 ‘네오 아우어파’라 불리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다. 그의 기교는 결코 현란한 바이올린 테크닉을 추구하지 않고 조형력, 톤, 힘의 세 요소가 균형을 갖춘 것이다. 또 아름답고 뉘앙스가 풍부한 소리에 낭만적이지만 절제된 맛이 있는 표현력을 갖추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 따뜻한 마음을 넉넉히 나누어 줄 아는 그런 연주자이다.
소위 스탠더드 레퍼토리뿐 아니라 동시대 작곡가들의 것에도 관심이 많아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카발레프스키, 하차투리안과 같은 유명 작곡가들의 것을 즐겨 연주했고 널리 알리는 데 힘섰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는 평생 동안 연주자로 지휘자로 교육자로 일을 참 많이 했다”고 고백하였는데 그의 아들 이고르를 비롯해 크레머, 빅토르 피카이젠, 올레그카간 등을 훌륭히 키워내 지금까지도 음악계에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교사로서의 업적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의 음반은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정수만을 간추려 본다면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과 로스트로포비치, 리허터와 함께한 베토벤의 3중 협주곡, 실내악곡으로 오보린과 협연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집 등이 있다. 부족하지만 토스카니니가 한 말로 끝을 맺고 싶다. “만약 오이스트라흐가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세계의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는 태양 앞의 별처럼 그 빛을 잃을 것이다.”
예후디 메뉴인(미국, 1916-)
금세기 최고의 천재 소년 바이올리니스트로 주목을 끌었던 메뉴인은 1916년 뉴욕의 한 러시아 유태계집안에서 태어났다.
4세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7세때 미국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유년기에 메뉴인은 벨기에 악파의 거두인 이자이의 제자이면, 아이작 스턴과 루지에로 리치를 길러낸 퍼싱거로부터 정통적인 주법을 전수받는 행운을 누렸다. 또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에네스코와 부쉬로부터 체계적이고 정성어린 가르침을 받아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빈번한 연주회와 잇단 유명세에 시달려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으나, 1947년 잘츠부르크・베를린에서 푸르트벵글러와 베토벤, 브람스 협주곡을 협연하여 음악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주법은 타성에 젖어 기복이 심한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포기라는 위기에 직면하여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바이올린에 대한 불같은 열정과 음악가로서의 사명을 쉽게 저버릴 수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초절적인 테크닉과 정열적인 주법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노년에 접어들면서 작품의 정신적인 깊이에 골똘히 몰입하는 학구적인 자세로 한층 원숙한 멋을 풍기고 있다. 영국에서는 메뉴인을 기리기 위해 메뉴인 음악 학교가 세워졌고, 그와 관련된 바스 음악제 등 여러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권한이 주어지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데, 지난 94년에 로열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하여 노익장의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메뉴인은 불과 14세 때 첫 레코딩을 시작한 만큼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자랑한다. 젊은 나이에 에네스코, 푸르트벵글러와 공연한 바흐, 베토벤, 바르토크 협주곡(EMI)에서 들려주는 웅혼한 악상은 여전히 신선한 매력을 발산하며, 또한 그가 지휘와 독주를 겸한 모차르트 협주곡 전집은 순수하고 밝은 음색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헨릭 세링(멕시코 1918-1988)
1918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세링크는 5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은사인 후베르만의 추천으로 칼플레쉬를 사사했다. 10세 때 유럽의 여러 음악 도시에서 공개 연주회를 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으며, 파리에서 자크 티보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2차 대전으로 전쟁에 휩싸인 고국에 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폴란드의 문화 사절로 활동하며 적십자와 자선 단체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 300여 회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그후 고국을 떠나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음악원 교수직을 맡아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고 비교적 조용하고 은둔적인 생활을 했다.
1950년 피아노의 거장 루빈스타인은 멕시코 연주 여행중 세링크의 기량에 탄복하여 무명에 가깝던 그를 듀엣의 독주자로 거명했다. 베일에 쌓인 세링크의 진가는 루빈스타인의 적극적인 초청으로 세계적인 이목을 끌기 시작했으며, 한때 루빈스 타인-세링크-푸르니에의 실내악 황금 콤비가 결성되기도 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을 누비는 정력적인 연주 활동을 통해 빛나는 성공을 거듭하여 그뤼미오, 스턴과 더불어 바이올린 세계 일인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절정기를 누리던 시기인 지난 1988년 독일에서 연주 여행중 갑자기 급서하여 애석하기 그지없다. 바이올린의 완벽주의자로 불려지는 세링크는 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를 번갈아 사용했다. 그의 연주 양식은 엄격한 조형미와 단정한 프레이징 속에 따스한 인간미와 우아한 감각을 잃지 않았고, 자유로운 강약의 대비법으로 지성과 감성의 밸런스를굴곡있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세링크의 레퍼토리는 바흐부터 바르토크까지 광범위했는데, 특히 초기 데뷔 레코딩 시절에 루빈스타인이 반주를 맡은 베토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RCA)가 뛰어나고,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DG), 하이팅크와 협연한 베토벤, 브람스 협주곡(PHILIPS) 등은 후세에 귀감이 되는 명연으로 애호가들의 뇌리에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고 있다.
루지에로 리치(미국, 1918-)
“그는 모차르트 이래고 가장 놀랄 만한 음악 천재다.” 1932년 루지에로 리치의 베를린 데뷔 공연을 본 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이미 어릴 적부터 유명인사의 관심을 끌던 리치는 미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대표적인 연주가로 음반보다는 콘서트 연주가로 많은 활약을 해 왔다.
실제로 첫 녹음을 시작한 것은 1938년이지만 그의 음반이 다른 연주가에 비해 많지가 않음을 감안할 때, 그가 녹음보다는 연주회에 비중을 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5세에 바이올린 활을 처음 쥔 리치의 음악수업은 루이스 퍼싱거의 가르침 아래 빠른 진전을 보게 되고, 10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성공적인 리사이틀을 벌인 이후 전문적인 콘서트 연주가로 인정받게 된다. 퍼싱거외에도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추천으로 쿨렌캄프의 지도를 받기도 한 리치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군복무 후에 가진 무반주 바이올린 콘서트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칠 줄 모르는 연주가로서의 재능은 제자 양성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이미 인디아나 대학과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고, 현재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의 교수로서 젊은 연주가를 가르치고 있는 그의 활동은 90년대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음반 녹음과 함께 성공적인 음악인의 한 예를 보여 준다.
지네느뵈(프랑스 1919-1949)
파리에서 태어난 지네 느뵈는 데니스 브레인, 디누 리파티, 구이도 칸델리 등과 같이 3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예술 인생을 마감한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벨기에-프랑스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인명부에 당당히 올라 있는 그의 음악성은 다양한 경력에서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불과 일곱 살의 나이에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공개 연주를 가졌던 그는 열한 살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조르주 에네스코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8개월 만에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이 기록은 반세기 전 비에니아프스키가 파리 음악원에서 이루었던 성취도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미 10대에 원숙한 경지에 올라 있던 느뵈의 연주력은 칼 플레쉬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고,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이미 명성을 얻고 있던 11년 연상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제치고 우승함으로써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렇듯 화려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경력들을 쌓으며 활동하던 그의 예기치 않은 죽음은 음악계에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EMI와 TESTAMENT, MUSIC & ARTS 등을 통해 발매된 음반들은 그녀의 음악적 정열과 재능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양적으로 아쉬움을 갖게 한다.
아이작 스턴(미국, 1920-)
아이작 스턴은 1920년 러시아의 클레미네츠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온 연주가이다. 8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그의 음악 교육이 미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특히 눈여겨 볼 만하다.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그의 자질을 계발시킨 스승은 당시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수석 연주자였던 나훔 블렌더였다.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에 대한 총괄적인 의문 점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게 해준 블렌더의 교육은 그가 음악적인 문제점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블렌더를 사사한 후 스턴은 더 이상의 음악 교육을 받지 않는다. 조기에 음암 교육을 끝내며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한 그의 레코딩 활동은 최근 에디션이 소니에서 발매되면서 눈길을 끌고 있지만 판매에서는 미지수가 아닌가 싶다.
미국이라는 환경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음악가로서 스턴이 관여하는 문화 예술 분야는 상당히 광범위하다. 라디오는 물론 영화와 TV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그는 미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예술가임에 틀림이 없지만 활동 범위가 미국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한계점을 내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레코딩과 연주회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아이작 스턴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연주가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아르투르 그뤼미오(벨기에, 1921-1986)
음반사마다 유명 연주가를 음반 판매 전략의 중심으로 두는 경우사 흔히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데카의 루치아노 파바로티로 그의 음반 판매량은 천문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립스의 경우 그 유명 연주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르투르 그뤼미오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간을 한 음반사에서 레코딩을 하며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작성해 놓은 인물이 그뤼미오이다.
베리오, 비외탕, 이자이의 뒤를 이어 프랑스-벨기에 계보의 정점에 올라 있는 그는 1921년 벨기에의 한 음악 가정에서 태어났다. 벨기에에서 알프레드 드브와에게 교습을 받으며 각종 음악상을 수상한 그뤼미오는 1930년대 파리에서 건너가 조르주 에네스코의 가르침을 받으며 음악 교육의 완성도를 기하게 된다. 비교적 늦은 편인 1945년의 런던 데뷔를 시작으로 세계 무대에 서기 시작한 그에 대한 평가는 연주 스타일과 투명성에서 긍정적인 판단을 이끌어 내게 한다. 그의 연주는 처음 듣는 이에게는 상당히 차갑게 느껴지는 것으로, 곡의 해석과 연주에서 지성적이 면서도 깔끔한 음의 처리가 돋보인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섬세한 음의 처리가 완숙기에 접어들게 되자 해석의 깊이까지 더해져 매우 만족스러운 연주를 들려주게 된다. 물론 외향적으로 자극적이거나 정열적이지는 않지만 예술적인 감성이 풍부한 연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매우 방대한 레코딩을 남겼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레코드점의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는 몇몇 음반이 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곡집, 베토벤의 협주곡과 클라라 하스킬과 함께 녹음한 소나타집, 그리고 모차르트의 소나타집은 LP 시대는 물론 CD 시대에 와서도 최고의 연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수년 전부터 국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그의 CD는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CD로 발매된 음반 중에 그의 초기 스테레오 녹음을 담은 세 장 짜리 음반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연주에서도 맛볼 수 없는 순수함과 열정이 깃들어 있다. 특히 이 음반의 매력은 코펠리에서 크라이슬러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점으로 그의 알려진 연주들이 주로 고전주의 음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반드시 들어 보아야 할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음악계에 남긴 업적은 작위 수여 등 다양한 형태로 생전에 인정받아 왔지만, 현대의 음악 애호가들이 사후의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와의 조우를 꾀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가치가 인정받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시몬 골드베르크(미국, 1909-?)
폴란드 출신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바르샤바에서 미할로비치의 지도를 받은 뒤 여덟 살의 나이로 베를린에서 칼 플레쉬를 사사했다. 열세 살 때 베를린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으며 3년뒤 베를린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1925년에는 드레스덴 필하모니의 악장을, 다시 1929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의 악장을 역임했다. 이 무렵 그는 실내악 활동에도 참가해서 힌데미트. 포이어만과 함께 트리오를 결성, 여러 차례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릴리 크라우스와는 듀엣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레코딩을 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교과서적인 해석으로 인정받아 왔다. 1938년에는 미국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고 2차 대전중에는 자바 섬의 포로 수용소에서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 골드베르크는 지휘에도 손을 대기 시작 했는데, 수많은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를 맡아서 호평을 얻기도 했다. 여러 국제 음악제를 통해 다채로운 음악 활동을 펼친 그는 줄리어드 음대를 거쳐 1981년 이후에는 필라델피아커티스 음악원에서 후진을 양성한 바 있다.
미샤 엘만(미국, 1891-1967)
러시아 출신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오데사 음악원에서 알렉산더 페델만을 사사하고 1899년 여덟 살의 나이로 공개 연주회를 열었다. 1902년부터 약 2년 동안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서 다시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904년에는 베를린에서 공식데뷔 무대를 갖게 되는데, 당시 엘만의 연주를 들은 아르투르니키쉬, 요제프 요아힘, 한스 리히터 등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격찬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엘만은 본격적인 순회 연주에 나서게 됐으며 독일을 비롯 영국, 미국 등지에서의 연주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23년 미국 시민원을 얻은 엘만은 1967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날 때가지 수많은 음반과 연주회를 통해서 가장 매혹적인 톤을 들려준 20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남게 된다.
소위 엘만톤이라고 해서 엘만의 바이올린 톤은 바이올린이 들려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음색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다. 페테르스부르크의 전통을 잇는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의 대표자로서 그가 남긴 음반은 지금까지도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온몸을 휘감을 듯한 비브라토와 포르타멘토는 오직 엘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기교적인 난이도를 넘어서 다른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칼 플레쉬는 엘만의 연주 스타일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고 있다. “감각적인 협화음과 동양풍으로 채색된 벨칸토, 바로 엘만의 톤이 갖는 특징이다. 그의 인토네이션은 맑은 종소리와도 같으며 이것이 고혹적인 음색을 이끌어 내는 원인이 되고 있다.”
브로니스아프 후베르만(폴란드, 1882-1947)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미에치슬라프 미할로비츠에게 배운 다음 불과 여섯 살의 나이로 루이 슈포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데뷔했고, 로드 사중주단의 일원으로 실내악 연주도 활발히 펼친 바 있다.
1892년에는 베를린으로 가서 요제프 요아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으며 1년 뒤에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참석한 가운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 작곡가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1934년부터 36년까지 빈 음악 학교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던 후베르만은 학교를 그만둔 다음 팔레스티나로 가서 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를 창립하게 되는데, 이 오케스트라는 후일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발전한다. 이후 그는 지휘자로서 또는 사회활동가로서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며 단순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후베르만의 연주는 독특한 운궁법으로 인해 당시에도 상당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화려한 기교를 앞세웠던 당대의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는 달리 그는 비교적 우직한 스타일의 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대중적인 지지도는 별로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해석을 사랑하는 팬들에게는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후베르만은 동시대인들에게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보다는 오히려 사회활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곤경에 빠진 수많은 유태음악인들을 도와 주었으며, 그 고매한 인격으로 인해 높은 존경을 받았다.
이다 헨델(영국, 1924-)
폴란드 출신의 영국 바이올리니스트.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헨델은 칼 플레쉬와 조르주 에제스코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열한 살 때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2년 뒤부터 공식적인 프로 연주자의 길에 나선다. 1946년에 미국에 데뷔해서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연주 스타일의 문제로 유럽이나 이스라엘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헨델의 진가를 아는 애호가들에게 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여루 바이올리니스트로 간주되고 있지만 사실상 여러 가지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 했다. 주로 그의 명성이 알려지게 된 것은 국제적인 바이올린 콩쿠르의 심사 위원으로서였다.
헨델 연주의 특징은 동시대의 느뵈와 같은 불 같은 열정도 아니고 에리카 모리니의 산뜻함도 아닌, 중용을 지키는 톤이었다. 젊은 시적의 연주를 들어 보면 다손간의 열기를 느낄 수 잇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르투오조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거만함 또는 과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함을 헨델 연주에서는 느낄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적인 지지도가 떨어졌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헨델은 최근까지도 콘서트를 개최할 만큼 생명력이 긴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20세기 연주사를 은은하게 빛내고 있다.
야사 하이페츠(미국, 1901-1987)
러시아 출신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음악 교육을 받은 후 빌라 음악원에서 엘리아스 말킨을 사사했다.
여섯 살 때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최초의 공개 연주회를 가진 하이페츠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발탁된다. 당시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재직하고 있었던 아우어의 배려로 하이페츠는 동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는데, 페테르스ㅜ르크가 유대인의 거주를 금지한 곳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조치였다. 1914년 아르투르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을 시작으로 하이페츠는 유럽 순회 공연의 장도에 올랐으며. 1917년에는 카네기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갖는다. 이 때부터 그의 명성은 전세계적인 것이 된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음반은 물론 콘서트를 통해서 수많은 음악팬을 열광시키기에 이른다.
너무나 완벽한 테크닉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른다는 버나드 쇼의 말처럼 하이페츠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왔다.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빈틈없는 연주는 당대 어떤 연주자도 넘보지 못할 독자적 영역으로 그가 남긴 수많은 음반과 함께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테크닉의 완벽성은 그 동안 정감이 없는 냉철한 연주라는, 다소 비판적 시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긴장감이 팽배해 있는 하이페츠의 톤을 물론 엘만규의 감성과는 근본적으로 맥을 달리하는 지극히 이성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마치 하이페츠와 음악을 냉혈한의 산물처럼 인식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거장이라 불리지 못한 거장들
-셤스키, 기틀리스, 코간, 수크
일본의 한 평론가는 오스카 셤스키(1917-)를 가리켜 ‘대가풍의 연주자로, 거장으로 남을 만한 인물로 꼽힌다’라고 평하였다. 하지만 그를 비슷한 연배의 메뉴인이나 세링크같이 ‘거장이다’라고 확언하지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셤스키는 젊은 시절 프림로즈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린을 말았고, 1938년부터 42년까지는 NBC 심포니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았다. 그 후 본격적으로 솔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니 너무 늦게 솔리스트의 길로 들어선 경우이다. 혹자는 그를 ‘대가 만성형의 연주자’라며 변호하려 하지만 대기 만성인 연주자는 각광받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물론 그도 8세 때 스토코프스키 지휘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데뷔할 만큼 신동이었다). 커티스에서 아우어와 짐발리스트를 사사한 미국 태생의 러시아 악파 최후의 연주자로서 그는 마땅히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연주는 주로 영국의 마이너 레이블리 ASV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같은 유태계 연주자들이 성공과 명성을 위해 탐욕스러운(?) 연주 활동을 펼칠 때에도 이브리 기틀리스(1992-)는 그러한 것들에 여연하지 않았다. 일찍이 후베르만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하였고, 에네스코, 티보, 플레쉬 등의 위대한 스승들에게서 배운 그는 빛나는 테크닉과 날카로운 감성을 지닌 연주로서도 높게 평가받는다(최근의 내한 공연에서도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욕심이 없다. ‘쉬어야겠다’ 생각되면 연주 활동을 쉬고, 또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되면 영화를 찍기도 하는 그가 끊임없이 연주 여행을 하고 음반을 찍어 내는 거장 연주자의 길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마치 피아니스트 굴드와 같이 기인에 속하는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오히려 다른 거장보다 음악적인 깨달음의 면에서 훨씬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연주자와 애호가들 사이를 떠돌며 최고의 연주라고 알려졌을 때까지도 레오니드 코간(1924-1982)은 베일에 쌓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러시아의 연주자들 가운데 서방에 잘 알려진 이들은 하나같이 ‘최고의 거장’ 칭호를 달았지만 코간은 철의 장막 뒤에서 신비롭게 빛나던 ‘미신’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그의 녹음이 속속 발굴되어 음반으로 발매되면서 그 신비감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커져만 간다.
‘이 연주자야말로 진정한 거장이 아닐까?’ 하고 자꾸만 의문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아우어의 제자인 암폴스키에게 배웠고, 15년 리즈 콩쿠르 1위를 차지한 그는 오이스트라흐의 대를 이은 러시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오이스트라흐보다 밝고 맑은 음색을 지니고 기교도 한 단계 예리하며 표현에 지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그리고 기능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연주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 러시아의 작곡가들에서 뿐만이 아니라 바흐나 브람스에서도 20세기적인 새로운 해석을 기하고 있다.
서양 음악 역사에는 두 사람의 요제프 수크가 등장한다. 첫번째 인물은 드보르작. 스메타나, 야나체크의 뒤를 이은 체코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1874-1935)이다. 그리고 여기에 소개되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1929-)는 작곡가 수크의 손자이다. 작곡가 수크의 아내가 드보르자크의 딸이었으므로 그는 드보르자크의 중손이 되는 셈이다. 좋은 혈통과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아 20세기 후반 체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군림하고 있는 그는 체코의 민족성을 반영한 우수에 넘치는 음색과 동경에 가득한 표현, 그리고 시정 넘치는 음악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수크 트리오를 조직하여 세계적인 실내악 단체로 인정받기도 하고, 많은 현악 4중주단과 함께 활동하는 등 실내악에 특히 많은 힘을 쏟았으며 비올리스트로서도 최고의 연주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에리카 모리니 (1904-1995)
빈에서 태어난 모리니(1904-1995)는 8세 때부터 세상에 재능을 발표하리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음악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아버지가 그의 첫 스승이었고, 그 뒤에 유명한 오타카세비치와 로자 호흐만 로젠펠트 밑에서 공부했다.
빈 음악 학교에서 마이스터 과정을 충분히 마친 뒤 라이프치히에서 명지휘자인 아르투르 니키쉬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신동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던 이 명지휘자는 진짜 신동인 모리니를 만난 이후 이러한 반감을 완전히 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모리니는 마드리드의 음악 협회에서 그의 연주를 들을 사라사테에게 ‘내 스페인 무곡을 가장 잘 이해하는 해석자’라는 호평을 듣기도 했다.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르투르 보단츠키의 지도로 카네기홀에서 데뷔했고, 미국과 유럽에서 번갈아 활동하면서 그는 칼 무크,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등 당시 최고의 지휘자들과 협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미국으로 이주해 프라도, 페르피냥 카잘스 음악제의 단골로 참석해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지난해 세상을 떠나 이제는 그의 음악을 음반으로 밖에 들을 수 없어 아쉴울 따름이다.
지오콘다 데 비토
비토 또한 이탈리아 출신이다. 1907년 태어나 1930, 40년대에는 베를린에서 활동했던 몇 안되는 국제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 그는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이어받고 난 후 인종 차별 정책으로 무대에 설 만한 연주자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 머물렀다. 이런 이유로 그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30년대에 이미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교수로 재직했던 비토의 활동은 대부분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1952년에는 브람스와 멘델스존 협주곡을 투린에서 푸르트뱅글러와 협연했지만 사적으로 제작된 이 녹음은 수준이 떨어져서 지휘자와 독주자의 명성에 치명적일 정도였다. 비토를 가리켜 선율학자 혹은 바이올린의 서사적 가수라는 평을 하는데, 이는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음반 가운데에는 기술적인 요소가 따라 주지 않아 좋은 음질로 감상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래도 가장 간직할 만한 것은 ‘지오콘다 데 비토의 예술’이란 이름이 붙은 가운데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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